그리스도향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1.05.29)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먼저.
로킴
2021. 5. 30. 21:32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1.05.29)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먼저.
2021년 5월 29일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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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요한 12,24-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 역사상 유명한 천재 한 명을 뽑는다면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마 대부분 ‘아인슈타인’을 떠올릴 것입니다. 과학 일반, 특히 물리학 분야에 큰 공헌을 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현대의 기술 몇 가지는 그의 연구가 있었기에 가능할 정도로 그의 업적은 뛰어나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런 아인슈타인이기에 사람들은 그가 아주 뛰어난 천재이고 실수를 거의 하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하지만 그는 복잡한 수학 문제 풀기를 좋아했지만, 쉬운 문제는 잘 풀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 중요한 연구에서 계산상의 실수도 많이 범했습니다. 이렇게 실수가 잦았지만, 그 누구도 그를 실패자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는 사람은 새로운 시도를 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실수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실수가 있어야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넘어지는 실수를 두려워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이 아이는 걷지 못할 것입니다. 계속 넘어지고 넘어지면서 걷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도 이렇게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데, 왜 어른이 되어서 실수를 두려워할까요? 오늘 우리는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미사를 봉헌합니다. 우리나라의 순교자들을 묵상해 봅니다. 그들 역시 처음에는 완벽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실수나 실패를 자주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존경받고 사랑받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주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너무 무섭고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배교를 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그렇게 실패했다고 주님께서 벌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 역시 받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배교를 했다가 곧바로 다시 순교를 선택하신 분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하셨던 우리 선조들의 신앙이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땅에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주님 안에서 힘을 얻고 참 기쁨의 생활을 하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실수나 실패에 연연하지 않고, 사랑이신 주님을 굳게 믿으면서 생활해야 합니다. 우리도 한 알의 밀알이 될 수 있습니다. ![]() ![]() 새벽 빛을 여는 사람들(김영주 화백) ![]()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먼저. 어떤 사람이 사소한 문제로 친한 친구와 크게 다퉜습니다. 그런데 다투는 와중에 ‘이게 이렇게 싸울 일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사과해야지.’라고 다짐을 했고, 정중하게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반응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친구는 정색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무슨 사과야?” 이 말에 화가 치밀어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내가 뭘 어쩌라고.”라고 말하면서 더 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누가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요? 둘 다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만,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질 수 있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바로 ‘내가 먼저 사과해야지.’라는 마음이 들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사과해야겠다’라는 생각에만 멈춰서는 안 됩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잘못했다고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입으로만 하는 사과는 상대에게 아무런 감응도 주지 않습니다. 우리의 뉘우침도 혹시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요? ![]() 주중 직심도(한국순교복자 124위 성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