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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을지로 골뱅이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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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킴 2014. 1. 6.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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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을지로3가의 골뱅이 골목. 1980년대에 형성된 을지로 골뱅이는 ‘골뱅이 전문점’을 내세운 구멍가게에서 비롯됐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을지로 골뱅이라는 음식을 처음 먹은 것이 1970년대 중반 고등학생 때였다. 장소는 내 고향인 경남 마산. 마산의 어느 맥줏집에서 먹은 것은 아니다. 그즈음에 을지로 골뱅이는 아직 태동기여서 을지로 밖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큰형이 서울 유학을 하고 있었는데, 방학 때에 집에 와서 이 음식을 선보였다. 서울에서는 골뱅이를 이렇게 먹는다며 동생들에게 '자랑질'을 한 것이다. 큰형이 재현한 을지로 골뱅이는 이랬다. 통조림 국물에 북어포를 담가 통조림 국물 맛이 배게 하였다. 파채는 물에 담가 매운맛을 줄였다. 북어포에 통조림 국물 맛이 배었다 싶으면 그릇에 골뱅이와 북어포, 파채를 담고 고춧가루와 식초로 버무렸다. 그때에 나는 참 신기해하며 이를 먹었다. 골뱅이 통조림도 귀하게 먹던 시절이니 큰형이 서울에서 배워 온 을지로 골뱅이는 서울의 멋지고 세련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인 줄 알았다.

1980년 나도 서울에 진출하였다. 그때부터 골뱅이무침을 참 많이도 먹었다. 맥주 안주로 이만 한 것이 없었다. 맛있어서가 아니었다. 양이 넉넉하였기 때문이다. 맥줏집 주인들의 인심이 좋았다는 말이 아니다. 이름만 골뱅이무침이지 무침 안에서 골뱅이 얼굴 한번 보기가 어려웠다. 북어포나 쥐치포, 그리고 파와 양파 등이 90%는 넘었다. 여기에 국수까지 비비면 안주를 넘어 끼니까지 되어 주었다. 그러면서 큰형이 동생들 앞에서 폼내며 요리해준 을지로 골뱅이의 '진실'에 대해 서서히 눈을 뜨게 되었다. 서울의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라는 진실.

지금도 그렇지만 골뱅이통조림은 비쌌다. 통조림 하나 따서 맥주 안주로 골뱅이만 날름날름 먹는다면 순식간에 동이 날 것이다. 통조림에는 골뱅이만 든 것이 아니다. 국물이 넉넉하게 들어 있다. 고맙게도, 이 국물의 맛이 골뱅이와 같다. 이 국물로 '골뱅이 맛의 확장'을 시도하였고, 그게 골뱅이무침이었다. 북어포나 쥐치포, 파, 양파 심지어 국수에 골뱅이 맛의 국물을 발라 먹는 음식이 골뱅이무침인 것이다. 국물이 희석되면 맛이 심심해지니 고춧가루, 마늘, 설탕, 식초 등의 양념이 추가되는 것이다.

# 을지로라는 곳

을지로에 처음 간 것이 1984년이었다. 학교 행사 인쇄물을 의뢰하기 위해서였다. 그 꼬불꼬불한 인쇄골목은, 무서웠다. 왱왱철크덕왱왱철크덕 기계 소리가 맹렬하게 골목을 휘젓고, 부앙부앙끼익끼익 오토바이들이 비키라고 소리쳤다. 인쇄공장 바로 위가 사무실이었다. 좁은 계단을 고개 숙여 겨우 올라가서 만난 사람들은, 표정이 없었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그래서" "그래서"를 반복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앞에 일거리가 잔뜩 있었기 때문이다. 손가락 끝에 고무골무를 끼고 인쇄된 종이를 펼치고 모으고 하였다. 자기 단골이라며 소개해준 '운동권 선배'의 이름은 괜히 꺼냈다 싶었다. 전혀 싸게 해준 것 같지는 않고 오히려 과하다 싶은 선불을 요구하였다. 학생들 일에 돈 떼인 일이 많을 것이라 짐작하였다. 그 골목을 나오는 길에 을지로 골뱅이 파는 가게 따위를 찾을 여유는 없었다. 그 골목을 최대한 빨리 빠져나왔다. 인쇄 교열을 보고 물건을 찾고 하면서 서너 번 그 골목을 더 찾았으나 그 과정은 같았다.

을지로는 일제강점기에 황금정통이라 불렸다. 경성의 상업중심지였다. 금융기관이 있었고 각종 상회가 밀집하였다. 물론 일본인이 이 거리의 주인이었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큰 상흔을 입었지만, 일제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을지로1가의 금융기관과 호텔, 백화점, 을지로3가의 여러 영화관, 그리고 4, 5가의 시장과 상가는 황금정통 시절의 주요 상권의 맥을 잇고 있다 할 수 있다.

을지로 골뱅이가 탄생한 지역은 을지로3가다. 인쇄골목이 있는 곳이다. 인쇄업체가 여기에 집중하게 된 것은 6·25전쟁 이후의 일이다. 일제강점기에 이 일대에 영화관이 몰려 있어 영화 홍보 전단지를 인쇄하는 업체가 있었고, 또 이 인근에 조선시대부터 한지 가게들이 있어 자연스럽게 인쇄골목으로 성장하였다. 도시 한복판의 낡은 건물에 제조업체가 몰려 있는 것을 마땅찮게 여기는 이들에 의해 인쇄업체의 수도권 외곽 이전이 시도되었으나 요즘도 여전히 을지로3가의 인쇄골목에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을지로 골뱅이 가게들은 지하철 2호선 을지로3가역 일대에 몰려 있다. 원조임을 주장하는 한 가게는 1960년대 말에 지금 형태의 골뱅이를 처음 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주변 상인의 말을 들어보면 그즈음에 골뱅이무침이 탄생한 것은 맞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면 1970년대 중반에 마산에서 을지로골뱅이라는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퍽 의외의 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때에 이미 골뱅이무침은 학사주점 등에서 널리 유행하고 있었고 을지로의 골뱅이무침은 뭔가 특별나다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1960년대 말에 등장한 을지로 골뱅이 전문 주점 이전에 이미 을지로에 을지로만의 골뱅이무침이 존재하였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 일본인 입맛에 맞춘 통조림골뱅이의 변신

골뱅이의 정식 명칭은 물레고둥이다. 동해에서 나는 고둥의 한 종류인데, 지역에 따라 때깔이 조금씩 차이가 나나 맛은 거의 같다. 동해안에서는 '백고동'이라 흔히 부른다. 조가비가 길쭉하고, 죽으면 살을 껍데기 밖으로 내미는 그 고둥이다. 살이 부드럽고 야들야들하며 단맛이 좋다.

골뱅이가 통조림으로 만들어진 것은 1960년대의 일이다. 애초에 일본 수출용으로 만들어졌다. 을지로 골뱅이 골목에서 최고의 골뱅이로 여기는 '동표'의 공장 설립 연도도 1962년이다. 골뱅이통조림 업체들이 일본 수출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니, 그즈음부터 골뱅이가 통조림에 담겨 전국에 팔렸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고둥으로 통조림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이다. 제주 등지에서 소라통조림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갔다. 전복도 그랬다. 생물로 운송하기 어려우니 통조림으로 만들었다. 그러니 통조림 양념은 일본인의 입맛에 맞춰졌을 것이다. 자료가 부족하여 동해의 골뱅이통조림이 일제강점기에도 제조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현재의 골뱅이통조림도 애초 일본 수출용으로 기획된 것이라 그 맛이 일본인의 기호에 맞춰진 것임은 분명하다. 일본의 바다에서도 골뱅이가 생산되며, 일본인들도 즐겨 먹는다. 일본의 슈퍼에서 골뱅이통조림을 사서 맛본 적이 있는데, 그 맛이 한국의 것과 똑같았다. 한국 소비자에게 판매되는 통조림이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의 기호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골뱅이무침의 탄생은 통조림골뱅이 맛을 한국화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요즘도 가끔 보는 일이지만, 옛날에는 구멍가게에서 술 마시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술집에 갈 형편도 안 되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여기서 술을 마셨다. 이런 일도 보았다. 아침에 일 나가면서 소주 한 병을 사서는 맥주잔에 한 잔 가득 따라 '원샷'으로 마신다. 소주는 맥주잔으로 두 잔이 나온다. 남은 소주는 구멍가게 계산대에 '키핑'을 하였다가 일 마치고 돌아오면서 마저 '원샷'을 한다. 안주는 구멍가게에서 제공하는 굵은소금. 조금 여유 있는 노동자는 안주도 산다. 구멍가게에서 서서 마시는 술이니 마른 것이나 먹어야 한다. 땅콩, 멸치, 오징어, 북어포 같은. 구멍가게 계산대 옆에 이런 마른안주가 아주 작은 포장으로 걸리게 된 연유이다. 술은 보통 계산대에서 선 채로 마시고, 그래서 그 바로 옆에 안주가 진열된 것이다.

그러다, 누군가가 구멍가게 한 귀퉁이에 진열되어 있는 골뱅이통조림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까기만 하면 먹을 수 있는 안주이다. 그런데 일본 수출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일본인 입맛에나 맞는 들척지근한 맛이 난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다, 누군가가 구멍가게 주인에게 매콤한 양념을 부탁하였을 것이다. 처음부터 파채까지는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고춧가루와 마늘 정도만 넣고 이를 안주로 삼다가, 서비스로 파채도 넣고 통조림 국물이 아까우니 여기에 북어포를 더하고 하면서 지금의 골뱅이무침 조리법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골뱅이무침 탄생에 대한 이 같은 추측에 나는 확신을 하고 있다. 을지로 인쇄골목에는 아직까지 구멍가게에서 파는 골뱅이무침이 있다. 통조림골뱅이 위에 파채 얹고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을 대충 올려주는 안주이다. 가격도 싸다.

1980년대 말 사대문 안에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때에야 처음으로 진짜 을지로 골뱅이를 먹었다. 허름한 구멍가게 앞의 좌판에서 골뱅이무침을 놓고 병맥주를 마셨다. 또 그때에야 비로소 큰형이 내게 '자랑질'을 하였던 을지로 골뱅이가 실제로 을지로에서 팔리는 골뱅이무침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을지로 골뱅이는 여느 맥줏집 골뱅이무침과 달리 파채에 고춧가루, 다진 마늘만 들어간다. 북어채도 곁들여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골뱅이와 양념한 파채를 따로 내기도 한다. 여느 생맥줏집의 골뱅이무침은 어떠냐 하면, 여기에 식초, 설탕, 또 어떤 곳은 고추장이 첨가된다. 그래서 을지로골뱅이는 완성된 요리가 아니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통조림을 따서 그대로 내놓기는 민망하니 대충 양념을 한 음식이라는 기분이 든다. 이 대충의 양념법에 을지로 골뱅이의 역사가 묻어 있다. 구멍가게에서 비롯한 음식이라는 흔적을 어떤 식으로든 남기려는 의도가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인쇄골목의 노동자들이 구멍가게에서 먹던!

# 인쇄기는 밤새 돌고

인쇄 노동은 무척 고되다. 밤을 새워 일하지 않으면 밥을 벌 수 없다. 인쇄기는 한순간에 흉기로 변할 수 있어 긴장의 연속이다. 이 거친 노동과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술이 최고이다. '일 끝나고 술'이 아니다. '일 중간에 술'이다.

을지로 골목을 걷다 보면 옛날의 구멍가게를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겉은 여느 편의점인데,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테이블 두어 개가 놓여 있다. 이런 형태의 편의점은 오피스 타운에 꼭 있다. 보통은 라면과 삶은 달걀 등을 판다. 직장인이 참을 먹는 장소이다. 을지로의 구멍가게는 술까지 판다. 여기에 안주로 골뱅이무침이 반드시 있다. 잠시 짬을 내어 술 한잔 하려는 노동자의 쉼터인 것이다.

1980년대 들어 인쇄골목에 화이트칼라가 섞이게 되었다. 1983년 지하철 2호선 을지로 구간이 완성되면서 그 주변으로 오피스 타운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을지로에 새롭게 진입한 이들 화이트칼라도 구멍가게의 골뱅이무침에 매료되었다. 입소문 내기 좋아하는 이들에 의해 을지로식 골뱅이무침은 순식간에 명물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 여름이면 을지로 구멍가게 앞은 골뱅이에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로 빼곡하였다. 더 많은 손님을 받으려는 이들이 골뱅이 전문점을 열었다. 간판에는 '을지로 골뱅이'라 써서 붙였다. 지금 을지로3가의 골뱅이 골목은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을지로 골뱅이 골목은 젊은이들의 순례지이다. 여느 맥줏집 골뱅이무침과 그 조리법이며 맛이 다르다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다. 이 골목의 골뱅이무침에 식초를 넣겠다든지 하면 골뱅이 맛도 모르는 미개인 취급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골뱅이무침이 어찌하여 그 골목에서 그런 양념법으로 탄생하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뼛골 빠지는 노동을 버티기 위한 낮술 이야기 같은 것은 골뱅이무침의 맛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말하지 않는다 하여도 을지로 골뱅이 골목 곁의 또 다른 골목에서는 인쇄기가 밤새워 돌고 그 거친 노동도 여전하다.

출처 : 고향으로 (그리스도의 향기)
글쓴이 : 이냐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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