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08.16)

그리스도향기

by 로킴 2016. 8. 16. 09:36

본문

 

2016년 8월 16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제1독서 에제 28,1-10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티로의 군주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마음이 교만하여,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의 자리에, 바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고 말한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3 과연 너는 다니엘보다 더 지혜로워, 어떤 비밀도 너에게는 심오하지 않다. 4 너는 지혜와 슬기로 재산을 모으고, 금과 은을 창고에 쌓았다.
5 너는 그 큰 지혜로 장사를 하여 재산을 늘리고는, 그 재산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졌다.
6 그러므로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7 그러므로 나 이제 이방인들을, 가장 잔혹한 민족들을 너에게 끌어들이리니, 그들이 칼을 빼 들어, 네 지혜로 이룬 아름다운 것들을 치고, 너의 영화를 더럽히며, 8 너를 구덩이로 내던지리라. 그러면 너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무참한 죽음을 맞이하리라.
9 너를 학살하는 자 앞에서도, 네가 감히 ′나는 신이다.′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너를 살해하는 자들의 손에 달린 사람일 뿐이지 신이 아니다. 10 너는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져,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의 죽음을 맞이하리라. 정녕 내가 말하였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복음 마태 19,23-30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24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5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7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2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29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30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새벽님들의 기도와 염려 덕분에 수원신학교에서의 개강피정을 마치고 잘 돌아왔습니다. 모교라고도 할 수 있는 신학교의 후배들에게 피정지도를 한다는 것이 너무나 큰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과거의 제 모습을 떠올려보면서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유 있는 시간도 보내다보니 휴가 온 느낌이었습니다. 아무튼 이제 다시 성지로 돌아왔으니 또 바쁘게 지내야겠죠? 다시 새롭게 시작한다는 마음을 갖고 오늘의 묵상 글 시작합니다.

어떤 책을 보니, 사람은 세 가지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일과 사랑과 그리고 상상력입니다. 이 세 가지를 얻으면 인생의 보람을 찾을 수 있고, 잃게 되면 쓰라린 질곡의 시간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당연히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쓴 분은 상상력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먼저 일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의식주와 안정감과 성취감을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랍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면서 삶의 의미를 찾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서도 말했듯이 이 책을 쓴 분은 제일 중요한 것이 상상력이라고 말합니다.

현재 서구 사회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도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은 스트레스와 소외감 때문이라고 하지만, 인간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던 상상력이 쇠약해진 결과라고 합니다. 상상력은 꿈꿀 수 있는 힘으로, 다시 말해서 희망을 품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래서 일과 사랑보다도 희망을 전해주는 상상력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희망이 있어야 일도 또 사랑도 행하면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 희망을 포기하고 절망을 선택합니다. 왜 그럴까요? 일이라고 표현하는 이 세상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돈과 명예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니, 이것을 얻지 못했을 때의 상실감과 좌절감이 너무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희망을 내려놓습니다. ‘해도 안 된다’는 절망이 가득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희망을 완전하게 잃어버리게 하는 말씀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말을 제자들이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희망을 뺏는 말씀이 아니라,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한 하느님의 힘으로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가치에 중요성을 두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두고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것이지요.

너무나 들어가기 어려운 하느님 나라. 그러나 하느님이 계시기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희망으로 세상의 가치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지금을 잘 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고 합니다.

두려움은 희망 없이 있을 수 없고 희망은 두려움 없이 있을 수 없다(스피노자).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이라면 가능합니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 없다?

많은 분들이 공부에는 때가 있다는 말씀들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면 잘 외워지지 않듯이 머리가 핑핑 돌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공부에는 따로 정해진 때가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공부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지지리도 공부를 싫어했다고 하면 맞을까요? 그래서 공부와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가 지금 열심히 공부합니다. 다음 학기부터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거든요. 또한 성지에서도 매주 특강을 해야 하거든요. 이 강의와 특강 모두, 전부터 하고 싶었던 것이었고 그러다보니 지금 계속해서 즐겁게 책을 보고 공부를 합니다.

이렇게 하고 싶어서 공부를 하니까 이제까지 살면서 체득한 경험까지 더해져서 이해가 더 빨라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잘 외워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공부가 재미있고 집중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요즘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의 대학 진학률이 80퍼센트를 넘는다고 합니다. 이 학생들이 모두 공부에 뜻을 세워서 대학교에 진학한 것일까요? 어쩌면 학벌 사회에 편입하기 위해, 대학을 가지 않으면 뒤쳐질까 봐, 취직하기 위해서 진학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이런 마음으로 과연 공부에 흥미를 가지고 집중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삶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어제 제 출신성당 사제 모임이 있었습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