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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117)왼손 가운뎃손가락

자연속으로쉼터

by 로킴 2022. 1. 15.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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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117)왼손 가운뎃손가락

 

스무살 갓 넘어 과부 된 순심이깊은밤

쫓기는 한남자를 숨겨주고는 결국 혼례까지 치렀는데… 

 

 

 

 

여자 팔자는 엿가락 구멍치기라고 했던가. 알 수 없는 게 여자의 앞날이다.

혼기가 차오른 순심이는 피어나는 꽃봉오리처럼 화사했다. 반듯한 이목구비에 젖가슴은 부풀어 오르고 잘록한 허리에 엉덩이 두쪽은 빵빵해 뭇남정네들이 침을 삼켰다.

 어디 자색(姿色·여자의 고운 얼굴이나 모습)뿐이랴. 양반 가문에다 몇백석을 거둬들이는 부잣집 셋째딸이다. 그래서 모두 순심이 팔자는 끝없이 펼쳐진 비단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웬걸, 고르고 골라 시집을 갔건만 떵떵거리는 시댁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신랑이 과거만 보면 낙방하더니 책이란 책은 모두 아궁이에 불살라 버리고 허구한 날 술독에 빠져 살았다. 첫날밤조차 술에 취해 새신부 옷고름도 안 풀어주었다. 어쩌다가 합환을 해도 술 냄새를 풍기며 껍적껍적하다가 픽 쓰러져 코를 골아 순심이는 한숨만 토했다. 홀아비였던 시아버지 장사를 지내고 삼년 탈상을 하자마자 신랑도 이승을 하직했다. 졸지에 과부가 된 것이다.

 시댁을 차고앉아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스무살이 갓 넘은 새댁이 어디 밥만 먹고 살 수 있는가. 방구들이 꺼져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다 방물장수로부터 향나무 목신(木腎)을 샀다. 그러나 그게 어디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가.

 동지섣달 기나긴 밤, 삼경(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이 깊어갈 때까지 호롱불 아래서 바느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저놈, 잡아라.”

 뒷골목에서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지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루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구냐!”

 순심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자 다급한 남정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좀 살려주시오.”

 그때 요란하게 대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장정 여럿이 몰려 들어왔다. 순심이는 얼른 방문을 열어 쫓기는 남자를 불러 장롱 속에 숨기고 마루로 나섰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이 무슨 행패요!”

 앙칼지게 소리쳐 그들을 돌려보냈다. 장롱 속에서 나온 허우대가 멀쩡한 젊은 남자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홀로 된 아버지가 몹쓸 병을 앓아 약값을 대느라 저잣거리에서 돈놀이 하는 최참봉에게 고리채를 빌렸는데, 약속한 날짜에 빚을 못 갚자 하인들에게 포박당해 그 집 광에 갇혀 있다가 탈출해 도망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마음 약한 순심이 부엌에 가서 밥상을 차려오고, 죽은 서방이 마시다 남긴 술도 내왔다.

 그날 밤, 그간 쌓이고 쌓였던 순심이의 갈증은 시원하게 풀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싸안고 치마, 바지, 저고리, 조끼를 흘리고 온 방을 뒹굴며 짐승처럼 울었다. 삼합을 치르고 발가벗은 채 껴안고 자다가 눈을 떴을 땐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또다시 일합을 치르고 그 남자가 일어서자 순심이는 두둑한 전대를 그의 허리에 묶어주며 당부했다.

 “고리채를 갚으세요, 서방님!”

 아뿔싸! 자기도 모르게 “서방님”이라고 불러버렸다. 그 남자는 울먹이며 나갔다가 밤늦게 다시 돌아왔다. 그러고선 낮에 푹 고아놓은 백숙을 싹 비운 뒤 그날 밤도 순심이를 두번이나 기절시켰다.

 며칠 후, 둘은 조촐하게 상을 차려놓고 혼례를 올렸다. 순심의 얼굴엔 화색이 돌고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강 건너 마을, 글방 야학 젊은 훈장으로만 알았던 서방이 떠돌이 노름꾼이라니. 첫날 삼경에 돈을 못 갚아 광에 갇혔다가 도망쳐 순심이 집에 숨어들어온 것도 사실은 노름판에서 속임수를 쓰다가 들켜 다른 노름꾼들에게 쫓긴 것이란 걸 매파 할미한테 들었다.

 그 얘기를 듣던 날 밤도 서방은 노름판에 끼었다가 늦게 들어왔다. 순심이는 그게 사실인지 서방에게 울면서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왼손을 펴 보였다. 새끼손가락과 넷째손가락이 없었다. 그는 “삼세판!”이라고 외치더니 부엌으로 들어가 도마 위에 부엌칼을 내리쳤다. 왼손 가운뎃손가락이 부엌 천장으로 핏줄기를 타고 튀어올랐다.

 그날 이후 노름꾼 서방은 두번 다시 노름판에 끼지 않았다. 착하고 성실하게, 하룻밤도 순심이를 외롭게 하지 않는 일등 남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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