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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2.10. 3)“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그리스도향기

by 로킴 2022. 10. 2.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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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2.10. 3)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2022년 10월 3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 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평화방송을 시작하면서 더 바빠졌습니다. 여기에 외부 강의도 늘어나면서 다른 곳에 신경 쓰기가 힘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시간 없어.”

글도 매일 써야 하고, 방송과 외부 강의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성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지 일도 그대로 해야 하기에 매일 바빴습니다. 그래서 좀 쉬고 싶더군요. 바로 이런 마음을 품고 있을 때, 원고 청탁 전화가 왔습니다.

예전에 홍보실장으로 있을 때, 원고 청탁의 어려움을 느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다짐했었습니다. 제게 원고 청탁하면 절대로 거절하지 않겠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일이 많다는 이유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마음이 너무 불편했습니다. 그러다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시간’ 때문에 하나씩 포기하게 되면, 결국 내게 남는 건 먹고사는 일의 고단함과 공허함밖에 없다.”(정김경숙)

시간 없는 것이 아니라 안 되는 일을 찾으려는 마음이 더 컸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신 능력과 재주를 저 편한 대로 다뤄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고단함과 공허함을 남기지 않기 위해 ‘시간 때문에’라는 핑계 만들기보다는 할 수 있는 긍정적 마음을 갖춰야 할 것입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라는 질문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워낙 유명한 비유인데, 이 비유에서 세상의 시선과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야기이지요. 사실 우리 사회의 관심은 범죄자 체포 여부가 관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강도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또 얼마나 잔인하게 강도질했는지를 궁금해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의 관심은 피해자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이 세상은 범죄자를 처벌해서 사회를 바로 잡으려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사랑으로 사회를 옳게 이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제, 레위인은 민족의 거룩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네들 직무와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피해자가 죽은 줄 알고 시체에 손을 대서 부정을 타지 않으려는 율법 준수가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어떤 이유도 필요 없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서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만이 진짜 이웃임을 강조하십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만드는 가짜 이웃은 안 됩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사랑할 수 있는 진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가치 있는 일에는 시간이 걸린다. 아마도 그것이 시간이 하는 역할일 것이다(제이슨 모토, 미국 소설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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