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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신 주님과 함께’라면....(연중 제 15주일)

그리스도향기

by 로킴 2005. 7. 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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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이신 주님과 함께’라면....(연중 제 15주일) / 이현철(이냐시오)신부 서울 강남을 비롯한 수도권의 집값이 천정부지로 많이 올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집값 상승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바로 좋은 교육환경이라고 합니다. 즉 이른바 ‘8학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런 교 육환경은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있듯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시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국 각 지역마다 스승이신 예수님이 계시는 성당 이 있고 또 가정교회라고 할 수 있는 크리스찬 가정이 많이 있는데 왜 우 리 지역의 집값은 오르지 않을까요? 그것은 스승이자 가정교사이신 주님을 존경하거나 함께 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을 ‘촌지만 밝히는 선생 김봉두’ 로 만들거나 아니면 ‘나혼자서도 잘 할 수 있어요’라는 우리의 오만한 생각 때문이 아닐까요? 참고로 영화 ‘선생 김봉두’와 빠다킹 신부님의 복음 묵상글을 소개합니다. 가브리엘통신 <선생 김봉두> 서울의 잘나가는 초등학교 선생인 김봉두는 아이들보다 한술 더 뜬다. 지각을 밥먹듯이 하고, 교장선생에게 매일매일 혼나는 이른바 문제선생. 교재 연구보다는 술을 더 좋아하고, 학부모들의 각종 돈봉투를 적극 권장 , 장려하던 어느 날,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라더니 김봉두는 봉투 사건 으로 인해 오지의 시골분교로 발령된다. 휴대폰도 터지지 않고, 외제담배는 커녕 국산담배도 구할 수 없는 오지 의 마을로 쫓겨난 김봉두. 전교생이라고는 달랑 5명. 더구나 돈봉투는 커녕 각종 채소, 김치, 과일 등을 나눠주는 너무도 순진한 마을사람들의 모습 또한 그에게는 불만이다. 1교시 자습, 2교시 미술, 3교시 체육... 하루라도 빨리 서울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면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던 김선생. 그리고 문맹 최노인이 한글을 가르쳐달라고 생떼를 쓰는 등 김선생의 귀양 살이(?)는 더더욱 암울해 보인다. 그런데 불량티처 김봉두는 하루빨리 서울 로 재입성하기위해 전교생을 서울로 전학보내고 그 학교를 폐교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아이들 개개인의 특기를 살려주기 위해 방과 후 특별과외에 매달리는 김선생. 그런 김선생의 시꺼먼 속마음과 달리 오히 려 마을 주민들과 교육청은 훌륭한 김봉두 선생으로 인해 폐교 방침을 재고 하게 된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봉두가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마을에 갑자기 학교를 서바이벌 게임장으로 만들겠다는 사업가가 등장하고, 김봉두 는 그들로 인해 그동안 잊고 지내던 돈봉투의 위력을 맛보았지만 시골학교의 ‘순박하고 착한 사람들’이라는 좋은 교육환경(?) 덕분에 순화되어 참스승 으로 변모해간다. (영화 ‘선생 김봉두’) <혼자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립시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의 학창시절 때에는 ‘체력장’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즉, 100m 달리기, 제자리멀리뛰기, 턱걸이, 윗몸 일으키기, 멀리 던지기, 오래 달리기등...이라는 종목을 통해서 등급을 매겼고, 이 등급을 통해서 나온 점수가 학력고사에 반영되었지요. 저는 늘 특급을 받았습니다. 6개 항목 총점이 88점 이상이 되면 특급이었는데, 마지막 테스트인 오래 달리 기를 하기도 전에 모든 종목에서 최고 점수를 받아 놓았거든요. 그래서 굳이 오래 달리기를 열심히 뛸 필요도 없었습니다. 오래 달리기에서 0점 받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특급 점수에 도달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사실 저는 다른 종 목은 모두 자신 있었는데, 이 오래 달리기만큼은 자신이 없었습니다. 1000m. 생각해보면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닌데, 왜 그렇게도 힘이 들던지요. 그래서 뛰 다가 포기하고 걸어서 들어온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그리고 지금 도 오래 달리기를 하자고 하면 괜히 부담감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어제 자전 거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매일 아침마다 자전거로 갔다오는 거리는 20Km입니다. 즉, 제가 그렇게 멀다고 느꼈던 1Km의 자그마치 20배나 넘는 거리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비가 오지 않는 한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같이 그 거리를 자전거로 다녀옵니다. 물론 힘들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학창시절 1000m 달리기를 하면서 느꼈던 죽을 정도로 힘들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분명히 1000m 보다 20배나 먼 거리입니다. 그런데 도 불구하고 힘들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전거를 타기 때문입니다. 자전거라는 하나의 매개체를 통해서 예전에 멀고 힘들다고 생각 했던 1000m라는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들의 삶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우리들에게는 늘 한계점이라는 것이 함 께 따라다닌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한계점을 자기 혼자 극복하려할 때 얼 마나 힘든가요? 너무나 힘들어서 ‘이것은 내가 극복할 수 없는 부분이야.’ 라는 생각으로 포기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 렇게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한계점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앞서 자전거 를 통해서 저의 한계점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 그 한계를 극 복할 수 있는 하나의 커다란 힘으로써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복음(마태 13, 1-23)에서 당신의 말씀을 좋은 열매를 맺게끔 하는 하나의 씨앗으로 비유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고통과 시련 가운데에서도 실망하거나 절망에 빠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포기하려는 그 한계점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이런 주님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거부 하는가’ 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 들의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반대로 주님을 거부한다 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을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로 만들어서 그 씨앗이 열매 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극복하고 싶어 하는 한계점. 그 극 복의 길은 바로 주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는 마 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나의 한계점에서 벗어나,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빠다킹 조명연 신부님의 복음묵상글 중에서- (이현철 / 마르코니 문화영성 연구소) 이현철(이냐시오)신부 십자가를 안테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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