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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피사의 사탑과 캄포산토 묘당벽화

보고걷고싶다

by 로킴 2012. 1. 29.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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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상의 문제로 인하여 "기울어지는 탑", 사탑(斜塔)이

오늘날 세계의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이태리의 피사(Pisa)에 있는 사탑(斜塔, Torre Pendente)은

현대 7대 불가사의에 선정될 만큼

기울어졌으면서도 넘어지지 않는 탑으로 유명한데

피사의 사탑은 높이 54.5 미터의 두오모 성당의 종루인데 1174년에 착공하여

10미터 높이에 이르렀을 때 지반이 내려앉아 잠시 공사를 중단했다가

다시 공사를 재개해 1350년에 8층탑으로 완공했다고 합니다.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은 완공한 뒤, 1년에 1mm 정도씩 기울기 시작하다가

지금은 수직 상태에서 5m나 기울어졌다고 합니다.

 

 

 

 

 

기울기가 이대로 진행되면 탑이 무너질 것을 염려하여

1990년에 복구작업에 들어갔는데 탑을 완전히 바로 세우지는 않고 10여년에 걸쳐

2001년 6월에 현재와 같은 상태로 탑이 더 이상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되게 

복구작업을 끝내고 현재 입장료를 받고 한번에 40명까지만 입장을 시키고 있습니다.

 

정상까지 294개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서 시내를 내려다 보는

풍경이 멋있을 것이지만

올라가는 것이 겁이 나서 올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사탑으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줄지어 선 행상들과

안으로 들어서면 많은 관광객들이 사탑을 손으로 미는 손짓을 하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더 관심을 가진 곳은 사탑과 두오모 성당 옆에 있는

중세 귀족들의 묘당이었습니다.

 

 

캄포 산토 묘당 입구

 

 

Campo Santo Monumentale (Monumental Cemetery)

 

 

 

 

이태리의 중세 귀족들의 묘가 안치된 이 묘당에 들어서니

좀 섬득하면서 숙연해지기도 했는데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들이 비록 빛이 바래졌지만 얼마나 멋있는지,

또한 귀족들의 묘, 로마시대의 석관(Roman Sarcophagi) 하나 하나가

예술품같은 조각 작품이어서 묘당이 아니라 마치 박물관과 같았습니다.

 

 

 

 

 

특히 이 묘당에는 유명한 그림이 있는데

그것은 "죽음의 승리"와 "최후의 심판과 지옥"이라는 그림입니다.

 

 

방의 왼쪽 벽이 "죽음의 승리", 앞쪽에 보이는 그림이
"최후의 심판과 지옥"입니다.

 

 

 

 

italy_trip_3012[1].jpg

"죽음의 승리" 일부

 

 

"죽음의 승리" 일부 (긴 그림을 두개로 나눠서 찍은 것입니다.)

 

 

"죽음의 승리, Triumph of Death"


"최후의 심판과 지옥, Last Judgement and Hell"

 

Buonamico di [son of] Martino, 마티노의 아들,

또는 Buonamico Buffalmacco라고 알려진 이 화가는

"죽음의 승리, Triumph of Death"와

"최후의 심판과 지옥, Last Judgement and Hell"를 그린 화가이며 

이 묘당의 대부분의 다른 프레스코화도 그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래는 "최후의 심판과 지옥"이라는 그림입니다.

 

 

"최후의 심판과 지옥" 일부

 

"최후의 심판과 지옥" 일부

 

 

"최후의 심판과 지옥"

 

 

 

이 그림들은 1944년, 세계 제2차대전 때 

폭탄이 떨어져 지붕이 불탔을 때 바닥에 떨어져 내리면서

거의 가루가 되었는데 나중에 이것을 모아 복원시켰다고 합니다.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죽음의 춤, Totentanz"

항가리 태생의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의 작품 "죽음의 춤, Totentanz", S.126은

리스트가 1838년에 다구부인과 이태리를 여행하던 중에 피사의 묘당에서 본

벽화 "죽음의 승리"에서 영감을 얻어 1849년에 피아노 협주곡으로 작곡하였는데

1853년과 1859년에 수정을 하여 1865년에

리스트의 제자 Hans von Bülow에 의해 초연된 곡이라고 합니다.

 

 

Franz Liszt의 "Totentanz" S126

Marc-Andre Hamelin with the Bremen Philharmonic

 

 

올 해가 "피아노의 파가니니"라고 불리우는 항가리 태생의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0.22. 1811 - 7. 31. 1886)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난 10월 22일이 그의 200번째 생일이었네요.

 

항가리의 라이딩근처 작은 마을에서 농장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현악기와 피아노도 칠 줄 아는 아버지가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서 자란 리스트는 7살 때부터 아버지로 부터

피아노를 배우면서 천재적 재능을 나타냈고

비엔나에서 베토벤의 제자 칼 체르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우며

12살에 데뷰를 하였고 작곡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22살에 파리에 가서 공부를 할 때 헥토로 베를리오즈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으며 파가니니의 공연을 다녀온 후에는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

매일 10시간이 넘도록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Franz Liszt (1847) Portrait by

Miklos Barabas, a Hungarian painter


Marie d'Agoult (1843),

painting by Henri Lehmann


 

 

 

 

 

 

 

 

 

 

 

 

 

 

 

 

 

 

 

파리에서 멋진 금발과 신비스러운 눈매로 파리의 음악계를

누비던 프란츠 리스트는 다섯살이나 연상의 미모와 교양을 지니고,

예술가들이 드나드는 살롱을 가지도 있었던

다구 백작부인, Countess Marie d'Agoult

(Marie Catherine Sophie de Flavigny: 1805 - 1876))와

스위스의 제네바로 사랑의 도피를 하여 결혼은 하지 않고

그곳에서 세 아이를 낳으면서 살다가 (1835-1839)

그 후에 리스트가 유럽 연주여행을 많이 다니게 되자 다구부인은

자녀들과 파리로 돌아가서 살다가

결국 1844년에 다구 부인과는 헤어지게 됩니다.

 

1842년 이 후 리스트는 여전히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유럽에서 컨서트를 하였는데 많은 열렬 팬들, 특히 여성팬들은

자신의 다이아몬드나 귀금속을 무대에 던지기도 하고

리스트의 실크 손수건이나 벨벳 장갑 등을 기념품으로 갖고자 빼앗기도 하는

"Lisztomania"가 유럽을 휩쓸었다고 합니다.

 

그는 많은 자선 음악회를 하며 베토벤 기념관, 항가리의 국립음악학교,

페스트의 레오폴드 교회 등의 건설에 도움을 주었고 개인적으로 병원, 학교나

자선단체에도 많은 기부금을 납부하였다고 합니다.

 

1847년 2월에 키에브에서 연주할 때 또 다른 여자, 러시아의 대 귀족인

Princess Carolyne zu Sayn-Wittgensteim(자인-비트겐슈타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음악생활에 큰 활력을 불어 넣어주었던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과

결혼하려고 했지만 교황청은 공작이 아직 살아있기에 공작 부인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아서 결혼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1859년에는 다구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 Daniel을 잃고,

1860년에 로마에서 비트겐슈타인 부인과 결혼하기로 예정되었었는데 하지 못하고

1862년에는 딸 Blandine 마저 잃게 되자 슬픔에 잠겨있다가

비트겐슈타인 부인과도 결별을 하고

1863년에 로마 교외에 아주 작은 아파트를 얻어 살며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Abbé 라는 칭호를 들으며 교회에 헌신하며 지내다가

다시 로마와 위마, 부다페스트 등을 다니며 연주를 계속하였습니다.

 

1886년 연주여행을 가던 중에 걸린 감기가 폐렴이 되어

바그너와 결혼한 둘째 딸 코지마의 품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피사의 캄포 산토 묘당의 "죽음의 승리" 벽화가 있는 이 방에서는

리스트의 "죽음의 춤(Totentanz)"이 가끔 공연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묘당을 다녀온 후 이 곡이 더욱 친근하게 느껴져서 자주 듣게 됩니다.

이 곡은 처음에는 죽음의 사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달려드는 것처럼

격렬하고 죽음을 상기시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지만 나중에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멜로디로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서

승리의 찬가를 부르는 듯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일 것입니다.

다구부인이나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 외에도 많은 여성 팬들을 몰고 다녔던

프란츠 리스트도 말년에 카톨릭 교회에 헌신하였던 것을 보면

죽음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 뿐이었다는 것을

그가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죽음의 승리...영원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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