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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7월 3일 주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그리스도향기

by 로킴 2005. 7. 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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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3일 주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마태 10, 17-22) 김기성 다니엘 신부 오늘 복음은 박해를 각오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제자들이 당한 박해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초대 교회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당한 박해를,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당하고 있는 박해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을 심문하고 단죄했던 대법정과 지방 회당 에 끌려갔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습니다. 창을 들고 자기들을 노려보는 병사들 앞에서, 또 자신들을 잡아먹으려고 포효하 는 사자들 앞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하느님 곁으로 나아갔습니다. 예수를 부인하기만 하면 살수도 있는데도, 무엇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도 끝까지 신앙을 증거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결코 생명을 경시한 것이 아닙니다. 악하고 못된 세상, 빨리 떠나기 위해서 죽음을 택한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이신 김대건 신부님의 삶 속에 아주 잘 나타나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1821년 8월 20일 충청도 내포 지방 솔뫼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사제가 되겠다고 어머님의 눈물을 등진 채 집을 나섰습니다. 어쩌면 살아서는 영영 못 만날 수도 있는 길을, 그것도 내나라 땅이 아닌 멀고먼 남의 나라까지 수만리를 오직 사제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최양업, 최방제 이 두 동료와 함께 걸어갔습니다. 머나먼 마카오를 수차례 왕래하는 어려움 속에서 사제 공부를 하셨습니다. 열다섯의 소년의 가슴에는 낯선 이국땅에 대한 신비로움보다는 따뜻했던 어머님 품이 그리워, 밤이면 남몰래 일어나 한없이 울었을 지도 모릅니다. 같이 공부를 하던 최방제가 먼저 하느님의 곁으로 떠나간 뒤에는 더욱 더 그러했 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천주교의 전교를 위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이 민족의 구원을 위한 정열과 사랑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수차례에 걸친 입국시도 끝에 부제 때 한번 고향 땅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다시 상해로 건너가 사제서품을 받아 이제는 사제의 신분으로 배를 타고 고향 땅에 돌아오셨습니다. 라파엘호라는 배를 타고 도착하신 곳이 전주 황산포라는 곳입니다. 그곳을 기념하고자 성당을 세웠는데 그곳이 바로 나바위 성당입니다. 김신부님은 1년여의 사목생활을 하다가 아직 입국하지 못한 최양업신부님과 다른 외국인 신부님들을 모셔오기 위해 백령도 근처에서 중국어선들과 접촉을 하셨습 니다. 그런데 돌아오다가 순위도에서 관헌의 의심을 사 잡히시게 되었습니다. 체포된 김 신부님은 황해감영을 통해 서울로 압송되어 포청에 갇히게 되었고 40여 차례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정부의 요청으로 세계지도 2매를 번역하고 지리개설서를 편설 하였습니다. 일부 고관들은 그분의 탁월한 인격과 굳은 신심, 해박한 지식에 감동하여 구명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온갖 회유책과 또 수십 차례에 걸친 고문에도 불구하고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결 코 배교를 하거나 나약한 모습을 보이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같이 감옥에 갇힌 이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결국 김 신부님은 잘린 머리를 성문에 걸어놓는 형벌인 군문 효수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한강변 새남터에서 사형 당하실 때 망나니가 앞에서 칼을 들 고 춤을 추고 있는데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의연한 자세로 칼을 치 기 좋은 목의 위치를 형리에게 물어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본 사람들이 그전보다 더 열심히 하느님을 믿게 되었고, 또 처형 장에 있었던 포졸들도 나중에 뉘우치고 하느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 신부님은 1925년 7월 5일에 복자품에 오르셨고, 1984년 한국 교회 창설 200주 년이 되던 해에 성인품에 오르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과거의 어두운 삶을 끝내고 새로운 빛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입니 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새로운 삶,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이 세상의 헛된 가 치들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님은 오직 조국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고자 이국 만 리 까지 가서 고생을 하셨고, 또 잡히신 다음 배교만 하면 고위 관직을 주겠다는 감언이설과 수십 차례에 걸친 고문과 박해 속에서도 현실의 모든 것을 뛰어넘으 셨습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초연하셨습니다. 결국은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죽으신 그리 스도의 생명에 자신의 생명을 일치시켰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로마시대나, 김대건 신부님께서 사셨던 조선시대처럼 천주교 신 자라는 이유만으로 순교를 당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대를 살아가면서 순교자의 삶을 본받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일 까요?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이 아닌 하느님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현대 물질문명이 가져다 준 삶의 풍요를 누리라고 속삭이는 수많 은 유혹들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유혹들 속에서도 가난한 이들의 절박한 요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하 여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소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결단이며 순교의 삶입니다. 또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역시 순교의 삶입니다. 그리고 순간순간 자신의 이기심을 죽이고 이웃을 배려하는 의타적인 마음과 행동 역시 순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이 어리석게 보여 조롱을 당하고 또 진리를 위해서 자신의 안락함이나 편리함을 포기해야 하는 어려움이나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라고 말씀하고 계 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진리가 있는 곳에 함께 계십니다. “잡혀갔을 때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때가 오면 너 희가 해야 할 일을 일러주실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라는 말씀을 통해서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굽어보시고 갚으실 것입니다. 진리를 따라 사셨던 예수님께서 비록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지만 하느님은 예 수님을 부활시키셔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공경을 드리고 있는 김대건 신부님께서 비록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 진 것 같지만 이렇게 살아있는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왜 나만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인간적 타산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주어진 사명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 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대화성당 김다니엘신부의 강론
출처 : 비공개
글쓴이 : 익명회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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