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5일 성령 강림 대축일(요한 20,19-23)김기성 다니엘 신부
[주호식 신부]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가 증언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오순절은 하느님과 시나이산에서 계약을 맺음으로써 출애굽을 완성한 사건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해마다 오순절에 율법선포를 기념하는 축제를 가졌습니다.
바로 이날, 출애굽을 통해 얻은 해방과 자유 그리고 하느님과의 계약을 기념하는
날에 협조자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신약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새로운 탄생을 만천하에 알려주셨습니
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강림 대축일을 보통 교회의 본격적인 설립일로 경축하고 있
습니다.
오늘 제 1독서가 전해주는 역사적인 성령강림 사건은 두 가지 점에서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성령강림 사건으로 제자들이 받은 언어의 특은입니다.
이 언어의 특은은 단순히 이상한 언어를 구사하는 정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유사 이래 인간들 사이를 가로막고 분열시켜 온 언어적, 사회적 모든 장벽들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한 순간에 사라져버리고, 하나로 일치할 수 있는 그 어떤
힘을 경험한 것입니다.
구약의 바벨탑 사건이 인간의 교만과 허황된 욕망으로 인해 서로의 일치가 단절된
혼란(인간 중심에 의한 분열)의 상징이라면, 성령강림 사건은 하느님의 은총에
겸손히 자신의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봄으로써(하느님 중심으로의 회귀) 인류가
하나 될 수 있음을 체험한 놀라운 사건입니다.
둘째, 인류의 일치는 이제 새로운 공동체의 성장을 통해 그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통해 3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
하는 새로운 하느님 백성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는 성령강림 사건이 신약의 새로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출발, 세상 끝 날에 완
성될 종말론적 구원 공동체의 서막을 알리는 희망의 사건임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성령강림 사건은 신학적으로 일치의 표징이요 공동체 형성의 원동력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서 협조자 성령을 보내주신 그 뜻대로 지금 우리가
올바로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현실은 일치와 공동체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
습니다.
사회적으로도 각계각층의 분열과 대립, 특히 경제난으로 인한 사회구성원간의 갈등
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부터 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을지 해답 없는 소리만이 우리 주위를 가득채
운 듯합니다.
분명 성령께서는 우리의 입과 귀를 열어주셔서 서로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일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은총을 주셨는데, 분열과 대립이 그치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공자의 제자 중에 자귄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눈보라가 치는 겨울날 자귄은 아버지와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 추위도 못 견딘다면 어찌 사내대장부라고 하겠느냐?"
아버지는 추위에 덜덜 떨며 걷는 자귄이 못마땅하여 그를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자귄은 여전히 잔뜩 웅크린 채 고개를 숙이고 걸었습니다.
"네 이 녀석, 어깨를 펴고 걷지 못하겠느냐?"
걸음을 멈춘 아버지는 자귄을 호되게 나무라며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바로 펴주
었습니다.
순간 자귄의 아버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자귄이 입고 있는 옷은 솜을 넣지 않은 홑옷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솜옷을 입어도 추운 날씨인데 홑옷을 입고 있는 아들을 보고 그제야 아버지는
자귄이 왜 그토록 떨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새로 맞이한 아내가 자귄을 이렇게까지 심하게 대할 줄 몰랐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화가 난 자귄의 아버지는 자귄에게 새어머니와 헤어지겠다고 말을 하고는 곧바로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러자 자귄이 아버지 팔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아버지, 안됩니다. 어머니와 헤어지지 마세요. 만일 아버지와 어머니가 헤어지면
새 동생들이 다른 아버지의 눈치를 받으며 눈물을 흘려야 하잖아요. 아버지, 동생
들이 모두 가엽게 되느니 차라리 제가 조금만 참겠어요. 그러니 제발 오늘 일은
모르는 체 하세요."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자귄의 어깨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자귄이 잠든 뒤에 아내에게 오늘 아들이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뒤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계모는 자귄을 극진하게 보살펴주었다고 합니다.
바로 여기서 공동체의 회복, 한 가정 공동체가 회복되는 아름다운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자귄이 새 동생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이라 표현할 수 있는
사랑과 새어머니에 대한용서의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에 성령의 은총으로 하나 된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우리
의 바람은 바로 이런 사랑과 용서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 공동체 형성의 원동력이신 성령은 오늘 복음이 전해주는
것처럼 일치를 위한 용서의 원동력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대화성당 김다니엘신부의 강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