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수요일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마르코 12, 18-27)김기성 다니엘 신부
[박상대 신부]
예수님 시대에 유대교 내에서는 사람이 이승에서 살다가 죽은 다음, 저승으로 가서 영원히
산다고 믿었지만, 육신의 부활에 대한 의견은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부활을 가르쳤지만,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부활을 부정해 왔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논쟁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모세가 정한 규정대로 자
식 없이 죽게 되는 일곱 형제와 차례로 살다가 마침내 죽은 여인이 일곱 형제와 더불어 모
두 부활한다면 진정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예수님을 궁지에 빠뜨리려 합니
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일축해 버립니다.
부활이란 이승생활의 연장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에로 옮아감을 뜻하는 것입니
다.
이 삶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실제로 보여주신 삶의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죽어야 영원히 살 수 있다고 가르치셨으며, 그래서 죽음이 죽음이아니
라 영원한 생명에로 나아가는 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결국 '구약의 성조들인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
느님은 죽은 자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자들의 하느님이시다.'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인즉, 하느님께는 우리 인간이 말하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작도 마침도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 하느님께 시간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 그것도 순수한 현재만 있
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시간 개념은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오늘, 현재, 또는 지금이라고 하는 시간은 그 양측에 무한히 연장되는 과거
시(過去時)와 미래시(未來時) 가운데서 점적(點的)인 범주, 또는 찰나적(刹那的) 영역으로
인식될 뿐입니다.
인간은 어제로 돌아갈 수도 없고 내일을 마음대로 앞당길 수도 없습니다.
그저 주어진 오늘, 현재, 그리고 지금을 살아갈 뿐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오늘이라는 현재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오늘은 어제를
만들고, 내일은 오늘에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말씀인즉, 아름다운 오늘로서 어제가 아름다워질 것이며, 내일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희망
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내일은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내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시원한 대답을 내리기란 힘든 일입니다.
한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내일이 뭐야?'
한참을 머뭇거리던 엄마는 '음.... 내일이란 말이야 오늘을 자고 나면 오는 날이 바로 내일
이란다.'
잠을 자고 나면 오는 날이 내일이라는 결론을 얻은 아이는 그 날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그
다음날 새벽같이 엄마, 아빠가 주무시고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 아직도 주무시고 계시는
엄마를 흔들어 깨우면서, '엄마, 엄마, 지금이 내일이지? 맞지?'하고 자신 있게 물었습니
다.
부스스 잠을 깨면서 엄마는 아이에게 '아냐, 지금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란다.'
그렇습니다.
내일이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는 오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이 귀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일은 분명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시간의 영역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내일을 약속합니다.
오늘 예식장에서 백년가약(百年佳約)을 주고받는 신랑 신부는 어떻게 이런 예측할 수 없는
일을 서로 약속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며칠 뒤의 스케줄을 짜고 몇 년 후의 계획을 세우는 모든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입
니까?
그것이 불확실성에 대한 확실성의 예측이나 추측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은 바로 오늘 때문입니다.
오늘을 자신 있게 사는 사람은 내일도 그렇게 살 수 있는 확률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너를 사랑하고 있다면, 내일도 너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을 오늘처럼 산다면 말입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늘 순수한 현재로 계시는 하느님 안에 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오늘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한 가지만 고집합니다.
1956년에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철학자 살리에즈는 '이성을 가진 인간의 생각은 감동, 아니
면 독선의 싹을 피운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본능에 따라 독선의 길을 따라 오늘을 살아갑니다.
여기서 독선은 아집과 고집, 자기중심주의와 배타주의를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감동의 길을 따라 오늘을 사는 방법도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감동의 방법으로 하루를 살아 보지 않으시렵니까?
대화성당 김다니엘신부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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