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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08.21)

그리스도향기

by 로킴 2016. 8. 21. 08:41

본문

 

2016년 8월 21일 연중 제21주일

제1독서 이사 66,18-2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8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19 나는 그들 가운데에 표징을 세우고,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타르시스와 풋, 활 잘 쏘는 루드, 투발과 야완 등 뭇 민족들에게 보내고, 나에 대하여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내 영광을 본 적도 없는 먼 섬들에 보내리니, 그들은 민족들에게 나의 영광을 알리리라.
20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깨끗한 그릇에 제물을 담아 주님의 집으로 가져오듯이, 그들도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 동포들을 주님에게 올리는 제물로, 말과 수레와 마차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 나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리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1 그러면 나는 그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사제로, 더러는 레위인으로 삼으리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제2독서 히브 12,5-7.11-13

형제 여러분, 5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시면서 내리시는 권고를 잊어버렸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7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11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12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13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복음 루카 13,22-30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27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28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9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30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어렸을 때의 보물 1호는 무엇이었습니까? 딱지, 구슬, 장난감, 인형 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이런 것들을 소중하게 여겼고 여기에 한 가지 더 첨가한다면 ‘우표’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된 지금, 어렸을 때에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아직도 소중하게 여기고 있을까요? 아마 아직도 딱지나 구슬을 보물 1호로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이것 없이는 못 살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왜 그럴까요?

생각해보니 지금 당장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들의 가치는 늘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별로 중요한 것들이 아니었는데, 당시에는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만 생각했던 것이지요. 즉, 변하는 가치에만 집중을 하고 있었던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우리들이 집중해야 할 것은 변하는 가치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가치입니다.

이 변하지 않는 가치는 무엇일까요? 사랑, 믿음, 희망, 평화, 정의 등의 눈에 보이는 가치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가치이기도 합니다. 이 변하지 않는 가치를 간직하면서 살기란 참 어렵습니다. 이 가치들은 물질적인 세상의 가치와는 너무나 큰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보다는 남을 위한 가치고, 지금 세상 안에서의 만족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 주님의 나라에서의 큰 만족을 가져다주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구원을 위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하십니다. 변하는 세상의 가치만을 추구해서는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가치를 계속해서 추구하는 우리들이기에 좁은 그 문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아무리 주님과 함께 식사를 했었다 하더라도 구원의 잔칫상에 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요.

미사에 열심히 참석한 것만으로 구원의 좁은 문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미사를 통해 얻는 은총이 엄청나지만, 형식적이고 보이기 위한 미사 참석은 주님께서도 별로 좋아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바로 변하지 않는 가치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흠 없는 도덕성, 그리고 영원한 사랑 등이 요구됩니다.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이 세상 안에서 첫째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는 변하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 첫째가 되기 때문에,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또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사람들이 생긴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떤가요? 주님께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좁은 문’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어려우니 일찌감치 포기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문이 작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으로 반드시 들어갈 수 있도록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주님의 변하지 않는 가치에 집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희망은 어떤 상황에서도 필요하다(사무엘 존슨).


날이 그토록 더운데도 많은 순례객들이 오십니다.


주님과 나의 거리.

갑곶성지에서 순례자들과 함께 미사를 하고나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저 카페 회원입니다. 저 페북 회원입니다. 저 카스 회원입니다. 저 밴드 회원입니다.”

제가 운영하는 카페의 회원은 한 15,000명 정도 됩니다. 그리고 페이스북 회원은 1,600명, 카카오 스토리는 1,900명, 밴드 회원은 1,200명이 넘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 이쪽에서 활동하면서 제 글을 보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 순간에 어떻게 응답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카페나 SNS에 제 글을 올리고는 있지만, 그 안에서 거의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분이 계시는지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전자 우편을 주고받았다고도 하지만, 하루에 수십 통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일일이 알 수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제가 쓴 글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면서 악의에 찬 글을 쓰시는 분들도 종종 만나기 때문에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터넷 안에서 제 글을 보셨다는 관계만으로 어떤 깊은 유대관계가 형성되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직접 보고 말을 나누었던 분은 다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미사 한 번, 기도 몇 번, 봉사활동 몇 차례 등을 통해서 주님과의 뜨거운 친분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꾸준히 만나고 대화를 하지 않는다면 주님과 나의 거리감은 좁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거리감을 좁히기 위한 노력들, 그 노력들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간장게장입니다. 맛있겠죠? 맛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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