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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08.22)

그리스도향기

by 로킴 2016. 8. 22.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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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22일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제1독서 2테살 1,1-5.11ㄴ-12

1 바오로와 실바누스와 티모테오가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테살로니카 사람들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2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3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 때문에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크게 자라나고 저마다 서로에게 베푸는 여러분 모두의 사랑이 더욱더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4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이 그 모든 박해와 환난을 겪으면서도 보여 준 인내와 믿음 때문에, 하느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자랑합니다. 5 이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징표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11 우리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여러분의 모든 선의와 믿음의 행위를 당신 힘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빕니다. 12 그리하여 우리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따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복음 마태 23,13-22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14)
1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16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17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19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사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고, 21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22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저는 원고청탁이나 강의부탁을 받으면 특별한 일이 없으면 승낙합니다. 저의 능력이 특별한 것은 아니고 이를 통해서 제 자신이 더 성장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즉, 원고를 쓰거나 강의를 준비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이를 통해 한층 더 성장하는 제가 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제게 부탁한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거절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급하면 제게 부탁을 할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허락하는 것이지요.

언젠가 원고를 부탁한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원고 청탁은 도저히 제가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한 번도 다뤄보지 않은 주제인 것은 물론이고 관심이 없었던 주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의 문제로 글을 쓸 수 없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웠습니다. 또 무조건 승낙하겠다는 원칙을 스스로 깨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원고 마감 시간이 5일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촉박해서 제게 글을 부탁한다는 이 말에 저는 오히려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 열흘은 주셔야 글을 쓸 수 있지 어떻게 오 일 만에 이 글을 쓸 수 있습니까?”라는 말로 거절했습니다.

저는 가장 적당한 방법으로 거절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다시 전화가 온 것입니다.

“신부님, 신부님 말씀 듣고서 편집장님께 열흘의 시간을 달라고 부탁해서 어렵게 허락받았습니다. 이제 열흘의 시간이 주어졌으니 써 주십시오.”

말한 것이 있으니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과연 마음에 드는 글을 쓸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아주 어렵게 글을 썼고, 동시에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장 적당한 방법으로 거절했다고 기뻐했지만, 그 방법이 오히려 저를 힘들게 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가장 적당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저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 이유를 솔직하게 말해주었다면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모자람으로 쓸 수 없다고 말하기보다는 상대방에게 문제(시간이 촉박하다는 것)를 돌리려고 했기 때문에 곤란을 겪게 된 것이지요. 어떤 경우에도 솔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나를 높이 세우려는 마음으로 인해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은 감추고 대신 상대방의 문제점만 부각시키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제와 율법학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돌보아야 할 사람들에게 끝이 없는 힘든 의무만을 부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제와 율법학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불행하여라.”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솔직하게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떤가요? 나는 주님으로부터 어떤 말을 들을까요?

도전하는 것은 잠깐 발판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도전하지 않는 것은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키르케고르).


미술 갤러리 다녀왔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아프리카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빨리 가려면 직선으로 가라. 깊이 가려면 굽이 돌아가라.
외나무가 되려거든 혼자 서라. 푸른 숲이 되려거든 함께 서라.
빨리 가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멀리 그리고 깊이 가는 것이 좋을까요? 외나무가 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푸른 숲이 되는 것이 좋을까요?

더 좋은 것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이지요. 그렇다면 선택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왜 당연히 해야 할 선택이 아닌 다른 선택을 하게 될까요? 조금만 욕심을 내려놓는다면, 조금만 더 함께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올바르고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한 병 따로 놓으면 볼 품 없지만, 이렇게 모아놓으니 빈 병도 멋있네요.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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