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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06.01)

그리스도향기

by 로킴 2016. 6. 1.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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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1일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독서 2티모 1,1-3.6-12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2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3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내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6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7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8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9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10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 11 나는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스승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12 그러한 까닭에 나는 이 고난을 겪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복음 마르 12,18-27

그때에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라는 식의 실패에 대한 격언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데 실패가 정말로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미국의 MIT 공대에서는 원숭이 실험을 통해 “실패보다는 성공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실패한 행동은 뇌세포에 거의 변화를 주지 못하고, 성공한 행동만이 뇌세포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었지요. 하긴 실패했을 때에는 좌절과 절망이 가득할 때가 많았지요. 그에 반해서 성공을 통해서는 성취감과 함께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를 볼 때도 성공했을 때에 감정이나 느낌이 더 풍부했었음을 깨닫게 되네요.

문제는 우리가 매번 성공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 성공을 위해서 실패라는 시간도 접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실패 자체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실패를 통해서 얻게 된 깨달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이 역시 또 하나의 성공 체험과 함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들, 그리고 스스로 단정하고 포기하는 생각들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지워야 합니다. 그보다는 기쁨을 줄 수 있는 긍정적인 생각들과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진취적인 생각들로 내 마음을 채워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면서도 이렇게 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얼마 전에도 이런 분을 한 번 만나게 되었지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단정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하는 분이었습니다. 기쁨의 체험이 없다보니 삶의 의미도 간직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이 기쁨의 체험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 부정적이고 폐쇄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생각, 불평의 마음보다는 감사하는 마음들이 바로 기쁨의 체험을 가능하게 해 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단정을 짓습니다. 그 이유를 아리송한 문제를 말하면서 설명하지요. 즉,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후사 없이 죽어서 율법에 따라 둘째가 형수를 아내로 삼았고, 또 후사 없이 죽었기 때문에 차례대로 아내로 삼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부활할 때에 이 아내는 일곱 형제 중에서 누구의 아내가 되냐는 것이지요. 누구의 아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부활 자체가 없다는 논리입니다.

하느님께는 세상의 질서와 시간에 얽매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의 일에서 불가능한 일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불가능하다고 단정하면서 하느님께도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자신의 틀 안에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부정적인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하느님을 계속해서 자신의 틀 안에만 가둘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꼭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무조건 잘될 거라는 낙관이 아니라, ‘일어나 버린 일은 항상 잘된 일이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보면 어느 상황에서든 배울 수 있습니다(법륜).


계속해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답동성당입니다.


그냥 고마울 뿐입니다.

초미니스커트를 입은 아가씨가 할아버지들이 앉아있는 노인정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모두들 한마디씩 했지요.

“정말 말세야.. 저런 치마를 어떻게 입을 수가 있지?”

“요즘 것들은 참... 정말로 예의도 없어.”

“에고 빨리 죽어야지. 그래야 내가 저런 꼴을 안 보지.”

그런데 한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옆에 계신 할아버지가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그 할머니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나? 나야 뭐 그냥 고마울 뿐이지.”

음흉한 할아버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아닐까 싶습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면 어떨까요? 결국은 자기 손해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고 판단해도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긍정적인 모습으로 바라보면 어떨까요? 세상을 즐길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 아닐까요?


오늘은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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