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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06.04)

그리스도향기

by 로킴 2016. 6. 4.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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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4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독서 이사 61,9-11

내 백성의 9 후손은 민족들 사이에, 그들의 자손은 겨레들 가운데에 널리 알려져, 그들을 보는 자들은 모두 그들이 주님께 복 받은 종족임을 알게 되리라.
10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11 땅이 새순을 돋아나게 하고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


복음 루카 2,41-51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혼자 놀았던 기억이 많습니다. 제 바로 위의 형님과 4살 차이라서, 형님이 학교에 가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집에 혼자 있어야만 했습니다. 더군다나 집 근처에 또래 친구도 없기 때문에 항상 혼자 놀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를 떠올려보면, 외로웠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혼자서 잘 놀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멋지고 재미있는 장난감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지금처럼 텔레비전에서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하루 종일 나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나무토막 하나만으로도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면서 하루 종일 가지고 놀았고, 종이와 연필만 있어도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심지어는 기도하는 묵주를 가지고서도 헬리콥터라면서 빙글빙글 돌리며 놀았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딱지라도 얻게 되면 며칠 동안 신나게 놀 거리가 되었지요. 이것뿐입니까? 라면 비밀봉지들을 모아서 동그랗게 만들어 공놀이 했던 기억도 납니다.

아마 지금 이렇게 노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스마트폰이 없으면 큰 일 날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루 종일 나오는 방송을 보면서 심심할 틈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더 많은 것을 가졌고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롭고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히려 너무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어서 지금 이 순간을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예를 들어, 신발이 20켤레나 있습니다. 이때 21번째의 신발을 누가 선물한 것입니다. 기쁠까요? 그리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충분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구두가 딱 한 켤레 있는데, 누가 새 구두를 선물했습니다. 어떨까요? 너무 기쁠 것이고, 새 구두 신을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릴 것입니다. 많은 것을 갖는 것, 높은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어떠한 상황에도 상관없이 이 순간에 만족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모님의 마음을 떠올리면 그 해결책을 찾을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 잉태소식을 듣는 그 순간부터 정말로 큰 일이 뻥뻥 터졌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갖게 된 것, 이집트로 피난한 것,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건, 예수님의 공생활 때에는 ‘미쳤다’는 소식까지 사람들에게 듣습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 죽음이라는 어마어마한 일도 겪으시지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실 뿐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전적으로 내어 맡기는 의탁의 삶이 이런 마음을 간직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을 맞이하면서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갈 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지금을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은 하느님께 의탁하면서 지금을 만족하며 사는 삶 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꿈은 환한 양초 불빛처럼 우리 인생의 행로를 장식하고 용기를 준다(올리버 골드스미스).


빛바랜 사진 속의 제 모습입니다. 혼자서도 잘 놀았어요.


브레이크는 내가 밟아야 합니다.

제게 면담을 요청하셔서 만났더니, 한 형제님과의 면담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즉, 그 형제님과의 면담이 가능한지를 묻기 위해서 면담을 요청하신 것이었지요. 강론을 들으면서 느끼는 것이 많았는데, 저와 그 형제님을 만나게 하면 분명히 그 형제님의 고민이 해결될 것 같은 확신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지요.

“물론 면담은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형제님이 원하시지 않으면 어떻게 면담을 할 수 있을까요? 본인이 원하지 않을 때에는 어떤 이야기도 통하지 않습니다.”

이분께서는 면담만 해주시면 분명히 형제님의 아픔이 치유될 것이라면서 제발 좀 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너무 완강하게 말씀하셔서 다음 날에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허락했습니다.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요?

면담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형제님께서 누구를 만날 마음이 전혀 없다면서 거절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 형제님께서 오신다고 해도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오겠다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억지로 끌려와서는 제대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차를 운전할 때 앞에 장애물이 생기면 얼른 브레이크를 밟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브레이크를 옆 좌석이나 뒷좌석에 앉은 사람이 밟을까요? 또 말로 “브레이크를 밟는다.”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운전하는 사람이 직접 자신의 발로 밟아야만 위험을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남이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바로 문제를 안고 있는 내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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