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4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마태 5,43-48)
[박선환 신부]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여라.”(마태 5,44).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과연 하느님이시로구나' 라고 감탄할 정도의 가르침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범인이
생각 못할 행동의 지침이기 때문이 더욱 그렇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가르치신 바를 죽음에까지 이르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철저하게 지키셨기에 무게와 힘이 더하여졌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가르침을 듣는 우리들에게는 '이제부터는 아무도 원수가
될 수가 없다'는 이 말씀에 부담을 갖습니다.
원수마저도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킨다면 아무도 원수 될 일이 없을 텐데 우리들은 왜 이
말씀에 커다란 부담을 갖게 됩니까?
아마도 우리들의 입장에서 원수를 만들지 말아야 된다는 것, 아무도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이 불가능하게만 생각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사제의 입장이지만 우리 신자들에게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하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도 서로가 원수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하시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원수로 삼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표현을 억지로 끼워 맞추면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어려운 고민이 있다며 상담을 할
때, 폭력을 행사하고, 칼을 들고 휘두르는 정말 미운 남편을 위해서 내가 어떤 기도를 해야 하겠느냐고 물을 땐 무슨 답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미워하는 감정을 누그러트릴 수가 없다는 하소연
앞에 꺼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궁여지책으로 미워하지 않으려고 어떤 노력을 기울여보았는지에 대해서
묻고, 그런 계획들이 처음부터 일목요연하게 준비되고 실행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맥 빠지는' 대답만을 들려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들었던 예수님의 새 가르침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미워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일차적으로 이웃이란 하느님께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민족은 제외가 되지만, 예외적인 규정으로 혈통은 같지 않더라도 같은 땅에 거주하고 있는 이방인들도 포함되었다는 점은 발전적인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갖는 특권과 계명은 그들 가운데 살고 있는
정착민들에게도 거의 똑같이 해당되었습니다.
이렇게 구약에서도 “이웃”의 범위는 상당히 넓은 것이었습니다.
이웃의 행복을 바라고 선을 행하라는, 법을 초월하는 진실되고 자비로운
사랑이 명령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에 결코 포함되어서는 안 될 대상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원수, 이스라엘의 적국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 땅과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과 한 가지로 보았기 때문에, 땅과 백성을 공격하는 세력에 대한 합법적인 증오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에서는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에 있어서 “원수는
미워하라”는 말로 쉽게 해석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웃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약과는 다르게 전개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어제 복음에서 읽었듯이(마태 5,38-42)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개념이 하늘나라에서는 더 이상 통용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당한만큼 상대방에게 해준다.”는 사고방식은 깨뜨려져야 하며,
이제 국민과 국가의 삶에 있어서 <친구와 적을 구별하는 것도 제거되어야 한다>는 놀라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 ‘원수’라고 하는 관념은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 앞에서 갈등을 느끼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는 우리를 시기하거나 미워하는 사람들, 악의를 가진 이웃이나
사업상의 경쟁자들을 연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살아계실 동안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당하신 것과 똑같은 적대와 중상을 받았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증오와 혐오로 대적해서도 안 되며 증오의 벽을 두껍게
해서도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임무는 증오보다 훨씬 더 큰 <사랑으로>
미움을 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은 <기도>에 대한 가르침 한 가지를 덧붙이십니다.
기도란 특별히 우호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만을 위해서 바쳐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기도란 편견이 없고 관대한 것이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모든 적대자를
포함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이천 년의 역사 안에서 이 길은 폭력을 쓰지 않고 겸손과
사랑으로 쟁취한 승리를 안겨줄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기도문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관대한 마음으로 살아가려는 의지를 담은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너그럽지 못한 나의 부족함을 주님께서 채워주시라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며,
참된 그리스도교 정신의 가장 성숙한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열매를 마음속으로 확신하면서 행동할 때 우리는 상상보다
훌륭한 수확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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